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평릉 사변 (문단 편집) === 끝없는 숙청, 찬탈의 가시화 === 사마의 사후 이듬해, 사마사는 대장군에 오르며 시중/도독중외제군/녹상서사를 겸하고 가절을 받았다. 이미 쥐고 있는 실권에 형식이 따라온 셈인데, 이 리스트는 조방 즉위 후 사마의가 겸한 직위와 거의 그대로 겹친다. 물론 사마의와는 달리, 사마사에게는 조상 같은 동렬의 견제자가 없었다. 《[[진서]]》가 밝히는 이 시기 사마사 정권의 주요 인사는 다음과 같다. 이후 사마씨와 척을 지게 되는 인물은 __밑줄__ 표시. * 참모진 - [[부하(삼국지)|부하]], [[우송]] * 인사 기용 - __[[이풍(조위)|이풍]]__, [[노육]] * 조정 내관 - __[[하후현]]__, __[[장집]]__, __[[종회]]__, [[왕숙]], [[진본]], [[맹강]], [[조풍]] * 사방 도독 - __[[관구검]]__, __[[제갈탄]]__, [[왕창]], [[호준]], __[[진태]]__ * 주요 주군(州郡)의 장 - __[[문흠]]__, [[등애]], [[왕기]], [[주태]], [[석포]] 이후 사마씨의 찬탈 행보를 둘러싼 투쟁의 무대에 주•조연으로 활약하게 될 인물들의 리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현대의 우리는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고, 이들 중 누가 배신하게 될지 이미 알고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과거 사마씨에게 주살당한 조상의 일파였기 때문에[* 특히 조상의 사촌이자 조위 마지막 친황계 거물이라고 부를만한 [[하후현]]이 아직 건재했다.] 당대 사람들조차도 이 인사 구성을 보고 충분히 불안한 기류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고평릉 사변은 사마씨 찬탈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선이라고 할 만하다. 당장 조상과 친척이자 그 내각의 핵심 인사였던 사마사의 구 처남이자 일생일대의 라이벌 하후현이 버젓이 끼어 있고, 세트 메뉴인 [[문흠]]을 [[관구검]]에 끼워 넣자면 이쪽도 조상의 덕을 많이 본 세력이었으며[* 관구검도 조상을 비롯한 조씨 황실 가문과 동향 출신으로 친분이 있긴 했다.], 제갈탄 또한 명제 조예 시절 정리해고 당한 것을 조상 일파인 등양/하후현과의 친분 덕에 정계에 복귀한 사람이었다. 이풍은 조상 일파와 사마씨 일파 사이에서 열심히 간을 본 인물이었지만, 고평릉 사변 당시의 반응으로 봐서 일단 그 시점에서는 실세였던 조상 쪽에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상을 죽이고 정권을 손에 넣은 사마씨 내각에, 어째서 이렇듯 조상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는지는 고평릉 사변의 사후처리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겨우 거사를 성공시킨 사마의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제2의 [[이각]]/[[곽사]]의 난'에 대한 우려였을 가능성이 높다. 반 세기 전, [[왕윤]]은 기껏 역적의 수괴인 [[동탁]]을 제거하고 후한의 조정을 바로 잡았으나 그 잔당의 처리에서 미흡한 면을 보였다. 천도한 장안에서는 양주 사람들을 모두 없애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가운데 왕윤은 뚜렷한 사면 의사를 표하지 않은 채 섣불리 소환령을 내렸고, 더군다나 그들을 무마하기 위해 보낸 사신 인선에서도 실수를 저지른 바람에, 그렇잖아도 불안에 떨던 이각 측을 자극해 결국 그들의 공격 앞에 무너졌다. 물론 사마의는 왕윤과는 달랐고, 위나라는 말기의 한나라가 아니었다. 과거 장안 조정은 관동 지방의 지배권을 잃고 완전히 서량의 병력에만 의존한 상황에서 그 서량군의 우두머리들과 척을 지어 자멸했으나 지금은 모반의 위험이 있는 정서장군 하후현의 관중군과 양주자사 제갈탄(+여강태수 문흠)의 양주군이 최전선의 정예군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나라 전체 전력의 일부일 뿐이다. 더군다나 옹주에는 옹주자사 곽회와 진태, 수춘에는 (아직 사마의를 배신하기 전인) 정동장군 왕릉같은 숙장들이 건재한 상황이었으니 최악의 경우라도 싸워야만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으리라. 다만 이들을 빼면 [[촉한]]과 [[손오]]라는 양대 국적이 있는 상황상 국가안보상의 문제가 있으므로 함부로 빼기도 힘들긴 했다. 숙청을 최소화하려 했던 사마의는 다른 사방 도독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단 한 사람, '진정한 위나라의 충신' 하후현만을 수도로 소환했다. 이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상 일파의 범위를 아무리 좁게 잡아도 빠질 수 없는, 조상 정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만큼 하후현이 정서장군으로 위나라 최고의 정예 병력인 관중군을 거느리도록 내버려 둬서는 조상 체제의 해체고 뭐고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과거 사마의가 이 전선에서 쌓아온 위업이 아직 장병에게 남아있고 반대로 하후현과 조상은 얼마 전 [[흥세 전투|흥세에서 대패]]하여 위신이 꺾였기 때문에 섣불리 군사력을 동원해 사마의에게 적대하지는 못하리란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마의를 믿지 못한 또 한 명의 관중군 주요 인사인 정촉호군 하후패도 자기 통제하 부대를 동원한 군사적 도전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원수국인 촉한으로의 망명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후패]]는 하후현에게도 함께 망명할 것을 권유했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는 하후현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소환에 응했다. 이 하후현의 처분에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렸는데, 사마의는 그의 정서장군 직은 박탈했지만 대홍려라는, 실권은 없어도 결코 낮다고는 할 수 없는 내직에 그를 앉혔다. '천하 명사가 반으로 줄었다'라는 소리가 나왔을 만큼 대대적인 숙청이었던 고평릉 사변이었다. 헌데 그 정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하후현이, 날개는 꺾였을지언정 목숨을 부지하고 여전히 관직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사마의가 다른 조상의 잔당들에게 보내는,' 더 이상의 유혈은 없다'는 메세지였던 것. 단순한 어필만이 아니었다. 이후 사마의는 왕릉의 난 당시 제갈탄을 진동장군이자 도독양주제군사에 올려 동부 전선 최전방의 총사령관으로 올려 주었고, 그에 맞춰 조상의 비호를 받아온 망나니인 문흠 또한 전장군 겸 제갈탄의 후임 양주자사로 승진시켰다. 결국 서부에선 조상 세력들이 자진해서 퇴장해 준 셈이고, 동부에선 적당히 화해의 제스쳐가 오간 셈이었다. 허나 이 공존은 하후현 자신이 말한 "사마의는 나를 살려주겠지만 사마사 형제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처럼 어디까지나 하후현 등을 훨씬 압도하는 위나라 최대의 영웅인 사마의의 위광 덕분에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마의가 죽고 난 후 그 뒤를 잇게 된 사마사나 사마소는 비록 그 권력과 권위를 승계 받았다고는 해도, 나이나 경력, 평판 등이 기껏해야 하후현과 동렬 정도에 머무르는 인물들이었고[* 드라마의 설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지만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사마사가 하후현에게 존댓말을, 하후현이 사마사에게 [[하게체]]를 쓰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더군다나 대외적인 군공은 전무했다. 잠시 사마의의 자비에 기대어 숨을 돌린 조상의 잔당들이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이 후계자 밑에서도 과연 숨을 죽이며 살아갈 것인가? 누구도 그렇게까지 낙관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사자들인 사마사, 사마소 역시 이들을 곱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이들을 내칠 수도 없었다. 사마의가 이렇게 반쯤은 타의적으로 타협하여 고평릉 사변을 종결시킨 이상 사마씨의 찬탈을 위해서 이미 하후현의 처분으로 종결된 조상 잔당에 대한 단죄를 다시 꺼내든다는 것도 불가능했고, 더군다나 사마의 덕분에 동부의 제갈탄 등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군사적 권한을 쥐게 된 상태였다. 여기에 고명대신들이 물러나고 친정 의지가 싹트기 시작한 황제 조방의 존재 역시 변수였다. 섣불리 행동을 했다간 오히려 양쪽에서 역공이 들어올 수 있었다. 결국 현실적으로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들 불안한 '시한폭탄'들을 안고 가는 수밖에 없었고, 사마씨 형제가 '시한폭탄'을 제거하는 과정은 사마의 사후 10여 년간 위나라를 피로 물들이는 사마씨의 찬탈을 위한 숙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숙청을 용인해준 다른 파벌들도 이때까지는 사마씨의 찬탈까지 동조해줄 생각은 별로 없었다. 조씨를 대체하는 신왕조를 개창해야만 할 정도로 조위의 상태가 후한 말처럼 심각했던 것도 아니었고, 사마사와 사마소가 사마의만한 명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찬탈을 할 명분이 없었다.[* 이것이 사마씨 찬탈에서 무려 재위 중인 황제를 살해하고 무리수에 가까웠던 촉한 정벌을 강행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서진 건국 후에도 가깝게는 건국군주인 사마염이 제대로 나라를 통치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를 제공했고 조금 멀게는 서진이 삼국통일을 한지 얼마 못가 붕괴된 이유를 제공했으며 멀게는 동진으로 이어나간 후 환온이 권신으로 떠오르면서 촉한정통론이라는 카드를 꺼내는 이유가 된다.] 사마의 사후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들에게 거역하는 [[관구검]], [[문흠]], [[제갈탄]] 등 지방군을 진압하고, 호족들과 명사들을 회유하며 파당을 형성하며[* 부실한 찬탈 명분을 덮기 위해 이들에게 각종 이득을 주며 꼬셔서 만든 파당이기 때문에, 진나라가 건국된 후로도 이들이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들 맘대로 심각한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질러대도 사마씨들은 그들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본격적인 찬탈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하고, 자신에게 저항한 하후현, [[장집]] 등을 죽였으며, 사마소는 조위 왕조 세력 최후의 저항이었던 [[조모(삼국지)|조모]]의 친위정변을 제압, 그를 백주대낮에 시해하고 허수아비 황제 [[조환]]을 옹립하며 사실상 조위 왕조를 멸망시켰다. 조모의 시해 이후 그 어떤 세력들도 다시는 사마씨에게 저항할 생각을 품지 못했으며 구석과 상국 같은 권리가 없어도 대장군의 직책을 가진 사마소가 황제에 등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이후 사마소는 궁극적으로 진나라를 세울 목적[* 훗날 사마씨가 황제로 군림하게 될 '진나라'는 이미 사마소가 진공(晉公)의 권리를 수없이 받았으나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는 판단하에서 받지만 않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사마씨의 본적인 하내가 바로 옛 진(晉)의 땅이었으니 다들 위라고 쓰고 진으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으로 [[촉한멸망전|촉한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진공(晉公)과 상국에 봉해지고 구석의 예우가 내려진 다음 곧바로 촉한이 멸망하자 진왕(晉王)으로 승진하고 황제와 똑같은 모습을 행사할 권리를 가져와 찬탈을 눈 앞에 두고 있었지만 급사하고 뒤를 이어 [[사마염]]이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한다. 사마염은 오나라까지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지만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서진은 통일한지 고작 반세기도 안 되어서 멸망해버리고 나라는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결국, 조위와 서진은 파란만장한 삼국통일의 마무리를 제대로 장식하지도 못한 채로 멸망한다. 훗날 동진의 명제 사마소[*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소와는 다른 인물이다.]는 이 이야기를 접하자 '선조가 그런 짓을 했으니 나라가 얼마 못 갔다.'라고 창피하게 여겼을만큼 후손들에게도 그리 떳떳하지 못하게 받아들여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